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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정보

모스크바외상회의 얄타회담 카이로회담 테헤란회담 포츠담회담 총정리!!

by 요엘¹ 2020.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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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요엘입니다:)

 

오늘 정치이야기는 한국전쟁 이전,

우리나라를 두고 진행된

각종 회담들에 대한 포스팅입니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구요-

모든 글은 제가 직접 정리하여,

작성했음을 알려드립니다.

 

당시 미소가 한반도를 분할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통일 국가를 주도할 국민적 대표세력이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또한, 이념이 다른 정치세력이 극심한 대립을 이루었고, 당시 미소가 세계전략을 구사하고 있었는데, 이에 맞물려 더욱 혼란스러웠다.

 

이 때, 한반도 문제를 두고 활발한 논의가 전개되었는데,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은 일본처리문제와 함께 카이로선언을 통하여 ‘적절한 시기(in due course)’에 한국이 독립을 하게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하지만 이는 신탁통지의 완곡한 표현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당시 미국은 한국의 신탁통치를 인도주의적 제국주의로 규정하고, 한국의 자치능력을 배양을 위하여 그리고 중국 소련의 일방적 영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테헤란 회담(1943.12)에서 루즈벨트는 한국이 40년간 훈련기간이 필요하다고 언급했으며, 얄타회담(1945.2)에서는 소련의 대일전 참가여부와 전후처리 문제가 대두되었다. 또한 이 회담에서 스탈린은 한국의 신탁통치에 대한 필요성을 재확인하였고, 이에 따라 소련의 팽창주의 전략은 노골화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포츠담 회담(1945.7)은 카이로 선언을 재확인한 회담이였다. 하지만 미소가 서로 상이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기에 한반도문제를 구체적으로 설계하지 못했다. 이때 트루먼은 소련을 불신하기 시작했으며, 대소 강경정책 기조를 가져갔다. 그 이유는 유럽에서 소련은 동독을 차지하고, 계속해서 그 영역을 넓혀갔을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위기를 느낀 트루먼은 조기에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에 투하하여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시도했다. 하지만, 소련군이 이미 북동지역에 진격하고 있던 때에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였고, 결국 소련군이 더 이상 남하하지 않도록 저지하는 수준에서 마무리되었다.

이후, 미소는 군사적 편의주의와 치밀한 정치적 계산 속에서 38선을 긋고,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모스크바 외상회의을 벌였다.(1945.12) 주요내용은 첫째, 통일 행정부문제 둘째, 미소공동위원회 설치 셋째, 5년 이내의 신탁통치 실시 넷째, 미소 군사령부 대표자회의 개최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미소의 명분상 타협에 대해서 한반도는 반탁운동을 전개하며 항의했고, 이후 2차례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냉전이 심화되면서 실패에 이르게 된다. 결국 미국은 한국문제를 제2차 un총회에 제기하게 되고 미국 결의안이 채택되면서 un한국 임시 위원단이 설치된다. 이에 따라 전 한반도에서 자유선거 실시 조치가 위임된다. 하지만 소련의 협상거부로 48년 5월 10일 남한접근 지역만 un총선거가 열리게 된다. 이후 8월 15일 남한정부가 세워지고, 9월 9일 북한도 정부를 설립한다.

 

결과적으로 미소의 기득권 고수와 상호불신 그리고 한국민의 이념대립과 극심한 분열이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시켰다는 복합적 추론이 가능하다. 또한 이러한 분단에 대해서 내부적인 원인과 외부적 원인을 들 수 있다. 내부적원인으로는 미소가 신탁통치 후 통일정부를 세우기로 하였으나 상황변화에 따라 분단된 것이라면 우리의 책임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다음 외부적원인으로는 그 당시 복잡한 국제정세에서 우리의 외교는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기에 모든 책임을 그 상황으로 귀결시키는 것이 그 주요한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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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건국 전후,

한반도를 두고 벌인

각종 회담들을 살펴봤습니다.

 

이해가 되셨길 바라며-

더 유익한 정보로 다시 돌아오겠씁니다!

 

지금까지 요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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